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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 1. 11편

depilled 2025. 8. 9. 16:58

11 편. 다섯 번째 회귀 - 잠재의식(2)


비행기는 일정한 속도로 하늘을 가르며 나아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층이 끊임없이 흘러갔다. 
재홍은 기내 방송에서 들려오는 기장 안내 멘트를 흘려들으며 자리에서 몸을 기울였다.
현재의 유진은 옆자리 재홍과의 어색함을 덜어내려 여러 대화를 나눴으나 이윽고 소재가 줄어들자
둘은 조용히 지겨운 비행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둘의 상황과 달리, 승무원들의 얼굴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들은 조용히 속삭이며 서로 신호를 주고받고 있었다.
현재의 유진은 본능적으로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뭔가 잘못된 것일까. 
유진은 잠재의식 속에서 밀려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고 불길한 느낌을 떨쳐내기 위해 재홍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니까, 어릴 때 그 사고만 아니었으면 난 지금쯤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겠죠.”

재홍은 유진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는 혼잣말처럼 웅얼거리다가 이내 다시 활기를 되찾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도 나는 그때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어요. 사고 당시… 누구 하나 나를 도와줄 수 없었는데, 오직 한 사람이 나를 살릴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을 찾을 수 없었죠.”

유진은 여전히 입을 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초조함을 감추려는 듯 빠르게 이어졌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다급한 외침이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왜? 왜 이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야!'

유진은 마치 정해진 대사를 읊듯 사고 이야기를 이어갔지만, 그의 내면은 이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소리쳤지만, 본성은 그를 외면했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과거를 떠올리듯 사고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근데 이게 이상한 게 뭐냐면, 그 얼굴이 기억이 안 난다는 거예요. 마치… 내 기억 속에서 흐려진 사람처럼요.”

재홍은 유진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쩐지 이 말이 묘하게 자신과 겹쳐 들렸다. 그는 유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참아왔던 질문을 던졌다.

“혹시… 사고가 나기 전에 버스에서 비슷하 또래와 자리를 바꿔 앉았었나요?”

내면의 유진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원래의 유진이라면, 알아 챌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반복된 회귀와 몸의 통제를 허락하는 존재, 그리고 방금의 대화에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 찰나의 생각이 머릿 속에 자리 잡는 순간, 유진은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밖으로 표출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기내가 흔들렸다. 승객들이 순간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기체가 급격히 기울어지며 흔들리자, 유진은 좌석 팔걸이를 강하게 붙잡았다.

‘안 돼. 이대로 또 떨어질 수는 없어.’

비행기가 정상적인 착륙을 하지 않는 이상,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 내면의 유진은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제 사고를 막을 방법이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비행기를 뜨지 않게 하는 것. 하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다.

현재의 유진은 좌석에 바짝 기대어 앉으며 옆자리에 있는 재홍을 바라보았다. 재홍은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듯, 멍한 얼굴이었다. 유진의 내면은 지금이라도 재홍에게 회귀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아니, 반드시 말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의 입은 단단히 틀어막힌 듯 열리지 않았다. 숨이 턱턱 막혔고, 마치 무언가에 의해 억눌린 느낌이었다. 다급함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그를 조종하는 듯한 또 다른 힘이 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때, 비행기가 급격히 기울었다.

산소 마스크가 내려왔고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 유진 역시 마스크를 착용하려고 했지만, 비행기가 급격히 기울어지며 재홍의 몸이 쏠렸다. 균형을 잃은 재홍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고, 그 순간 유진의 산소 마스크를 잡아채고 말았다.

“그건 제 마스크 입니다!”

유진이 재홍을 밀치려는 순간, 그의 손이 재홍의 팔에 스쳤다.

그는 밀쳐내려는 의도였지만, 그 순간 자신의 손이 재홍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붙잡았다고 해야 할까? 그의 본성은 밀어내려 했지만, 내면에서 울부짖던 무언가가 손을 움직이게 했다. 마치 몸이 내면의 바람을 읽고, 그가 바라는 대로 움직인 것처럼. 재홍과 닿는 순간, 마치 강한 전류가 흐르듯 유진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고, 내면의 모든 혼란이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는 이제 자유였다. 유진은 빠르게 재홍의 마스크를 잡아당겨 되돌려주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는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재홍은 이미 의식을 잃고 있었다. 그의 몸은 축 늘어졌고, 유진이 아무리 말을 걸어도 반응하지 않았다. 단절된 듯한 감각. 답답함이 밀려왔다. 마치 손끝에 닿았던 희미한 온기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왔던 순간, 마침내 닿았다고 생각한 순간이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몸을 휘감던 짜릿한 전율은 사라지고, 대신 차가운 공기만이 감돌았다. 유진은 이를 악물었다.

'이게 다야? 이게 끝이야?'

그러나 아무리 외쳐도 돌아오는 것은 공허한 침묵뿐이었다.

그러던 중, 유진은 시선을 돌렸다. 이번 회귀 내내 어딘가 위화감을 느꼈던 또 다른 존재. 민수.
그는 유진을 보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온전한 시선으로.
유진의 입술이 떨렸다. 마지막 기회였다. 그의 목소리는 희미하지만 분명했다.

“드디어 알았네요… 생명의 은인을.”

그 순간, 기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비행기는 곧 추락하게 됩니다. 행운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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