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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 1. 8편

depilled 2025. 8. 9. 16:08

8 편. 세 번째 회귀 - 질식사(2)

-재홍의 시점-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새벽이었다. 재홍의 세 번째 회귀였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재홍은 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몸이 무거웠다. 이상한 꿈을 꾼 기분이었다. 하지만, 곧 시계를 확인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오전 5시 30분.
원래라면 출국 준비로 분주했을 시간보다도 한참 이른 시간이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일찍 공항에 도착해 여유 있게 움직이면 된다.
샤워를 마친 후 옷을 차려 입고, 가방을 정리했다. 택시를 불러 호텔을 나서며 습기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창밖으로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택시는 조용히 공항으로 향했고, 그는 별생각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공항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분주했다. 체크인 카운터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전광판에는 항공편 정보가 계속해서 바뀌고 있었다. 재홍은 줄을 서서 기다리며 대형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뉴스가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미국 경찰, 연쇄 살인마 검거. 최근 몇 년간 다수의 피해자 발생…]
수속을 마치고 탑승구 쪽으로 이동하던 중, 멀리서 들려오는 고성이 들렸다.
"당신들 뭐하는 거야? 이게 지금 정상적인 절차냐고!"
그는 그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보안 검색대 앞에서 휠체어를 탄 남자가 보안 요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손짓까지 하며 격앙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굳이 휘말릴 필요 없지.’
그는 발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상사의 이름이 떴다.
"네, 말씀하세요."
상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 건에 대한 보상금 지급 관련 서류 준비됐지? 장애 판정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가능한 한 최저 금액으로 합의할 수 있도록 해. 그쪽에서 소송 걸려고 하면 곤란하니까 최대한 빨리 서명 받아와."
재홍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리스트를 확인해서 연락해보겠습니다."
그는 상사가 보내준 피해자 목록을 확인했다. 위에서부터 전화를 걸려다가 별다른 이유 없이 가장 아래에 적힌 번호를 눌렀다.
그 이름은… 민수였다.
재홍은 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울린 뒤,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요?"
"안녕하세요. 저는 차량 리콜 관련 피해 보상 협상을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혹시 잠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민수는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지만, 결국 대답했다.
"얼마나 받을 수 있습니까"
재홍은 상사의 지시대로 최대한 낮은 금액으로 합의를 끌어내야 했지만, 막상 입을 떼려 하자 약간의 망설임이 들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원래 계획대로 협상을 진행하기로 했다.
"관련 서류를 검토해 봐야 정확한 금액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혹시 직접 만나서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지금 공항이고, 비행기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안될 것 같은데."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한국 도착 후에 따로 시간을 내서 뵙는 게 가능할까요?"
"그래야겠네요."
"네, 감사합니다. 조심히 귀국하세요."
전화를 끊으며 재홍은 순간적으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별다른 감정 없이 진행한 협상이었지만, 어쩐지 머릿속 한편이 불편했다.

-유진의 시점-

유진은 질식으로 죽었던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도 한숨을 쉬었다. 익숙한 풍경, 익숙한 과정.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그는 두 번째 회귀 때처럼 공항에 도착했다. 이전에는 그저 흐름에 몸을 맡겼지만, 이번엔 한 가지 확신이 있었다. 재홍이 자신과 부딪힌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그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출국장 안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하지만, 예상보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재홍은 이미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기대했던 변수는 이미 엇나가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몸이 불편한 남자가 시큐리티와 싸우고 있었다. 지난 번 죽음에서 유진이 의심했던 민수였다.
유진의 시선이 잠시 그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몸은 다시 정해진 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체크인을 마치고, 보안 검색대를 지나, 탑승구로 향하는 동안, 그는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이번에는 비행기를 타지 않기를.
그러나 그는 다시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비행기가 이륙한 후, 창밖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기내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스튜어디스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기내 수화물 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발견했다.
그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는 일어나 승무원을 향해 다가갔다. 손에 소화기를 쥐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그는 행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또 다른 손이 소화기를 들었다.
재홍이었다.
재홍이 소화기를 급하게 움켜쥐는 순간, 그의 손이 유진의 팔을 스치듯 닿았다. 서툴고 급박한 움직임 속에서 아주 짧은 접촉이었지만, 그 순간 유진의 온몸이 전율했다. 마치 단절되어 있던 감각이 단번에 되살아나는 듯한 충격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순간, 유진은 자신의 몸이 자유로워 졌음을 느꼈다. 이제 더 이상 정해진 대로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모든 감각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숨소리가 들리고, 땀이 흐르고, 심장이 뛰었다.
유진은 재홍을 바라보며 말했다.
"드디어 닿았다."
그리고, 폭발음이 들려왔다.
재홍은 다시 아침에 눈을 떴다.

-민수의 시점-

죽어있던 폐가 다시 움직이고 호흡이 되돌아옴을 느꼈다.
유진과 재홍이 필사적으로 불을 끄던 모습이 점점 되감기듯 움직였다. 화염은 다시 일어나 연기로 변해 사라졌고, 검게 그을렸던 기내는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듯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승객들이 공포에 질려 벌떡 일어났던 몸을 다시 의자에 기대었고, 그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비명은 목구멍으로 삼켜지듯 사라졌다.
산소 마스크가 올라가고, 비상등이 점차 희미해졌다. 승무원들은 바쁘게 움직이던 모습을 멈추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유진의 손에서 소화기가 떨어지는 듯 보였지만, 사실은 반대로 소화기를 다시 붙잡아 원래 있던 자리로 가져다놓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민수는 자신의 몸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산소가 부족해 억지로 벌어졌던 그의 입이 천천히 닫히고, 허둥대던 손이 무릎 위로 차분히 내려앉았다.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자신이 다시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알았다. 다시…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연기가 천천히 사라졌다. 퍼져나가던 검은 연무가 마치 거꾸로 빨려 들어가듯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시끄럽게 울리던 경보음도 점차 잦아들었다. 승객들의 비명도 사라지고, 기체는 다시 안정감을 되찾았다.
민수의 몸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였다. 그는 자신의 좌석으로 되돌아갔다. 마스크를 벗었던 손이 다시 올라가 마스크를 제대로 착용했고, 혼란스러운 기내는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해졌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정리가 되지 않았다.
‘또 다시... 돌아가고 있어...’
그는 이제 이 패턴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곧 자신이 비행기에서 내려가는 것을 깨달았다.
거꾸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는 승무원들의 안내를 따라 비행기에서 후진하듯 걸어 내려왔다. 공항 탑승구를 거슬러 올라가고, 검색대를 지나 다시 공항 로비로 되돌아갔다.
이미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예상하고 있었다. 이제 곧 리콜 담당자와의 통화가 올 것이고, 그는 기분이 상할 것이며, 결국 합의를 보겠다고 결심하게 될 것이다.
‘이젠 알겠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어.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고.’
그는 체념하며 공항 로비를 지나가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시큐리티와 실랑이를 벌이지 않았다.
그것은 민수의 의도가 아니었다. 그는 이전 회귀들에서 공항 보안 요원과 실랑이를 벌이며 불만을 터뜨렸었지만, 이번에는 마치 이미 자신이 그 일을 겪었기라도 한 듯 조용히 이동하고 있었다.
‘왜…?’
그는 의문을 품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계속해서 거꾸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객실 문이 닫히고, 몸이 저절로 침대로 눕혀졌다. 눈꺼풀이 저절로 감겼다. 그러나 그는 알았다.
이대로 평온히 잠들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다시 죽음의 순간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유진이 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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