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편. 네 번째 회귀 - 이유 모를 사고(1)
-유진의 시점-
유진은 질식의 고통을 똑똑히 기억했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며 공항에 도착했다. 불안과 초조함이 그의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공항에 들어서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번에도 재홍과 부딪혀 몸이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했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재홍은 능숙하게 그를 피해 빠르게 출국장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유진은 허탈감과 함께 이번에도 자유 의지를 가지지 못한 채 정해진 흐름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휠체어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유진의 등을 타고 올라왔다.
‘뭔가 달라졌다…’
불길한 기운을 떨쳐내고 티켓 발권대로 향했다. 티켓을 발급받는 동안, 어디선가 전화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누군가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잠시 고개를 돌려 소리의 출처를 찾았지만, 곧 시선을 거두었다.
탑승구로 걸어가던 중, 유진의 발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작은 가죽 파우치였다. 그는 무심코 파우치를 집어 들어 열어보았다. 안에 들어 있던 투명한 병을 확인한 순간, 숨이 턱 막혔다.
"폭발물...?"
심장이 요동쳤다. 유진은 곧장 보안 요원에게 달려갔다.
"여기 폭발물이 있어요! 빨리 조치하세요!"
그러나 이것은 유진 내면의 의지가 아니었다. 유진이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본성에 의한 행동이었고, 이것이 비행기 화재의 원인임을 알고 있던 것은 내면 속 죽음을 반복하고 있는 유진이었다.
탑승구 주변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보안 요원들의 긴급한 움직임과 함께 비행기 이륙이 연기되었다. 유진은 일단 위기를 넘겼다는 안도감에 빠졌다.
잠시 후, 다시 비행기 탑승 안내가 시작되었다.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불안했지만, 그저 현재의 유진에게 끌려다니고 있는 내면의 유진에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유진은 조용히 비행기에 올라 자리에 앉았다.
-재홍의 시점-
침대에서 눈을 떴다. 시간은 평소와 같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찜찜함이 남아 있었다. 일어나 가방을 챙기고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도 기묘한 위화감이 가시지 않았다.
네 번째 회귀임에도 역시 재홍에게는 처음이었다. 그는 아직도 죽음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모른 채 다시 죽음을 맞이하러 갈 뿐이었다.
공항 입구에 다다랐을 때, 가까스로 누군가와의 충돌을 피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탑승 절차를 밟으려던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상사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렸다.
명단을 보다가 맨 아래의 민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누구시죠?"
"피해 보상 협상 담당자입니다. 잠시 말씀 나누시죠."
"얼마까지 가능합니까? 지금 공항이라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오늘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그럼 한국에서 만나서 얘기하죠. 저도 곧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재홍은 전화를 끊고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런데 안내 방송이 다시 울렸다. 비행기 이륙이 지연된다는 내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수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이륙이 지연됐으니 지금 만나서 협상 진행하는게 어떻겠소"
재홍은 망설였지만 결국 민수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빠르게 민수를 만나 협상을 진행하고 합의서에 서명을 받았다.
이후 그는 상사에게 보고를 해야 했기에 결국 비행기 예약을 취소하고 다음 항공편을 예약했다.
그는 호텔로 돌아와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몇 시간 후, TV에서 충격적인 뉴스가 흘러나왔다.
"비행기가 추락했습니다.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재홍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민수와의 짧은 협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윽고 그의 눈앞은 어둠으로 덮였고,
재홍은 죽지 않았음에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듯이 다시 그 날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민수의 시점-
시간이 거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기체는 급격히 기울어졌다.
"버드 스트라이크! 엔진 하나가 꺼졌어!"
승객들이 술렁였고, 소란스러운 기내는 점점 조용해졌다. 민수는 호흡이 점점 정돈되는 것을 느꼈다. 과호흡으로 헐떡이던 폐는 서서히 차분해졌고, 의식이 흐려지던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유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거꾸로 울려 퍼졌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그의 손이 민수의 가슴을 강하게 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곧 손이 다시 떨어졌고, 그의 몸에서 물러났다. 그의 이마를 타고 흐르던 땀방울이 다시 얼굴로 스며들었다.
민수의 폐는 다시 편안하게 부풀어 올랐다. 심장은 점점 더 안정적으로 뛰었고, 온몸이 서서히 이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안도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목을 조르고 있다는 감각이 사라지고, 그는 차분하게 의식 속으로 가라앉았다. 기내의 혼란이 거꾸로 정돈되며, 승객들은 차례로 자리에 앉았고, 다시 안전벨트를 조였다.
그의 폐가 막히는 듯한 고통은 차츰 사라졌고, 시간이 점점 더 빠르게 과거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유진의 얼굴에서 땀이 다시 이마로 흘러들어갔다. 그의 손은 민수의 가슴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갔다. 그의 입은 움직였지만, 목소리는 뒤집힌 음악처럼 울렸다.
기체가 급격히 기울어지는 것이 멈추고, 승객들의 비명도 다시 안으로 삼켜졌다. 불안에 떨던 사람들이 점점 차분해졌고, 방금 전까지 내려오던 산소 마스크가 천천히 올라갔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었다.
민수의 머릿속에 혼란이 밀려왔다. 그는 이번에도 다시 죽음으로부터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기내 좌석에 앉아 있었다. 이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러다 옆자리에 앉은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정말 감사했어요."
목소리는 희미하게 울렸다. 민수는 처음엔 그 말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때, 그렇게 살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소리는 마치 물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퍼졌다. 민수의 귀는 순간적으로 둔해졌고, 누가 말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중에서야 알았어요. 그 사람이 없었으면 난 살아남지 못했을 거란 걸."
이제야 민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유진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은 이미 닫혀 있었다. 목소리는 그의 입에서 나오지 않고, 어딘가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지는 듯했다.
"버스가 전복됐죠."
"다들 놀랐어요."
"난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자리를 양보했는데."
"그 자리만 천장이 무너지지 않았어요."
"살아남을 줄 몰랐어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언젠가 그 사람을 찾아야겠다고."
문장이 뒤집힌 채 쏟아져 나왔다. 마치 조각난 퍼즐을 거꾸로 맞추는 듯했다. 문장 하나하나가 민수의 머릿속에서 어긋나며 다시 재구성되었다.
그제야 민수는 깨달았다. 대화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것을. 민수는 무심코 그의 말을 들었지만,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는 이전에 재홍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보상금을 제안했던 재홍 역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본인 역시 차량 사고의 생존자로서, 사고의 공포를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 사고가 아니었다면 자동차 회사에서 일할 일은 없었을거라 말했었다.
유진이 말하는 사람이 같은 사람일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민수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다시 과거의 흐름 속으로 빠져들었다.
시간은 계속 거꾸로 흘렀고, 민수는 여전히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나 침대에 눕는 순간, 다시 끔찍한 감각이 몰려왔다.
목이 이미 부러져 있었다. 그의 시야는 거꾸로 펼쳐졌고, 부서진 신경과 뼈가 서서히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몸이 꼼짝없이 굳어 있는 상태에서, 부러진 목뼈가 조각을 맞추듯 다시 결합되어 갔다.
어두웠던 시야가 점점 밝아졌다. 손끝의 감각이 되살아났고, 차갑게 굳어 있던 근육이 다시 풀리기 시작했다. 통증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되돌아가며, 죽음에서 생명으로 복귀하는 과정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는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되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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